잡담과 희망

초여름

이 맘때 산책을 나서면 아카시아 향기가 나는 그런 때인가.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걷고 싶다. 마음껏 걸어다닐 수 있는 자유로움이 퍽 소중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아니어도 곧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 지친다.

잡담과 희망

팬텀싱어3 : 최성훈 김영재 님의 She

팬텀싱어를 시즌1부터 즐겨보는 시청자로서, 나는 특별히 응원하는 참가자가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 그 이유는 출연진 모두가 간절한 사람들이라서 누구 한명을 더 특별히 좋아하고 편드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그 점이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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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누구의 팬이라고 말하긴 어렵고 또 좋은 음색을 지닌 참가자들이 워낙 많지만, 한 명 신기해서 시선이 가는 출연자가 있다. 오늘 본 잔나비의 <She> 라는 곡을 부른 최성훈 님이다.

이 노래 특성 상, She 가 여러번 반복되는데 그 발음을 노래 후반부에 살짝 틀어서 ‘시’와 ‘씨’의 중간 어디쯤으로.

그런 약간의 변형이 가사와 무대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마이크를 쓰는 것이나 무대에서의 몸짓과 표정 등이 모두 어우러져서 노래 가사에 담긴 행복을 표현한다.

She 는 노래를 환상적으로 잘 불러서 압도 당하지만, 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무대를 보면 서너배는 풍요로운 느낌이 드는 이유는 얼굴 표정 (근육의 사용) 가사 전달 면에서 워낙 최성훈 카운터테너가 탁월한 분이라 소리만 들었을 때보다 무대 전체를 보았을 때 감동이 배가된다는 생각.

그가 손을 어떻게 쓰는지, 시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넋놓고 보다가 이 역시 엄청난 훈련의 결과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최성훈과 뚜렷하게 대비될 수 밖에 없도록, 옆에서 노래한 초심자가 마치 고등학교 졸업이나 대학교 입학 무대에서 주먹 쥐고 얼어서 노래하는 인상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연을 온전히 즐기려면 한 사람은 눈을 뜨고 봐야하고 한 사람은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어야 했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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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해도, 오늘 잔나비의 <She> 를 편곡해서 부른 무대는 최성훈의 노래를 듣다가 숨막히게 아름다워서 눈물이 흘렀다. 어떤 감정 이전에 극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눈물이 난 게 몇년만인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그 새 늙어서 눈물이 많아졌던가.) 이 무대 이후 기억나는 게 없다. 보통 한 무대 좋아도 다음 무대가 좋으면 또 빠져드는데 이 노래 다음에 기억나는 곡이 없다.

 

잔나비가 부른 She 에 대한 인상

잔나비가 부른 원곡은 초창기 비틀즈의 느낌이 난다. 음의 배열이나 목소리 톤이 비틀즈의 예전 곡들을 연상시킨다. She 라는 제목 때문인지 몰라도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위해 만든 노래 Woman 이 떠오르기도 하다.

 

처음으로 잔나비의 She 라는 곡을 들었는데 이 그룹에 대해 잡음이 있었던 것 같다. 자세히 검색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인성 논란’이든 아니면 어떤 종류의 논란이든 She 라는 곡은 팬텀싱어3 에서 훌륭한 가수를 만나 빛이 났어도, She 가 떠올리게 한 존 레논의 Woman 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의 느낌이 든다. 존 레논의 Woman 은 약간 과장을 보태면 ‘하찮던 나를 품어준 통 큰 사람, 당신. 그 앞에서 나 죽었소이다’ 하는 느낌인 반면, 잔나비의 She 가 표현하는 사랑하는 여자는 지친 남자가 마음 쉬고 가는 ‘안식처’ 일 뿐.

존 레논이 Woman 을 만들었을 때 오노 요코에게 크게 잘 못한 일이 있어서 화해하려고 만든 노래라고 전에 얼핏 읽은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가 그런 상황에서 만들었기에 ‘나 죽었소이다’ 했을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레논과 요코는 동반자였고 또 한편 요코는 레논이 최초의 아이돌 밴드에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는 다른 컬러의 예술가로 급변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이기에 레논의 인생에서 요코가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다.

아무튼 팬텀싱어 때문에 두 곡을 비교해서 잠깐 생각하다가 ‘느낌은 살렸지만 알맹이는 전혀 다른’ 두 곡을 만난 느낌이랄까. 그리고 ‘레트로’ 라는 이름으로 복고 ‘풍’이고 ‘여전사’ 라는 단어를 통해 살짝 ‘내가 이렇게 좀 다른 시각에서 여성을 표현해 봤다’는 티를 내려고 하지만 단어 악세사리 느낌이고 노래에 담긴 생각은 정말 레트로인 듯한. 너무 박한 말은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감동받은 가수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니.

 

다시 최성훈 님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서…

그는 솔로 무대에서 군더더기 없이 당당하게 나와서 신기할 정도로 노래를 잘 하고 들어갔다. 그는 스위스 유학파라고 했는데 그것 외에 어떠한 것도 알려진 게 없다.

많은 출연자에게 인터뷰와 경력/학력을 통해 서사를 부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대단한 실력자인데 건조할 정도로 개인사에 대해 별 얘기가 없다. 사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시선이 갔다. 솔로 때 최성훈의 음색은 정교했고 꾀꼬리가 사람의 모습이라면 딱 저 사람의 모습이겠다 싶을 정도로 청량했다. 노래할 때 몸짓이 대단히 클래식한 오페라 가수를 연상시킨다.

오늘 방송을 볼 땐, 최성훈 님이 너무 고도의 훈련과 재능을 갖춘 노련한 보컬이라 베이스를 맡은 김영재가 상대 파트로서 많이 어설프게 노래하는 것 같았는데 여러번 귀에 꽂고 들어보니 김영재도 아쉬움 없이 잘 했더라. 그 학생의 수준과 상황에서.

다만 최성훈 님이 사람 홀리듯 너무 잘 불렀다. 자기 목소리를 어떻게 컨트롤 하는지 정확히 아는 노련한 사람과 이제 막 성악을 시작한 풋풋한 젊은이가 한팀이 되기엔 수준 차이가 너무 컸을 뿐.그래서 베이스로 다른 사람이 부른다면 구본수 님처럼 그 음역대와 목소리의 표현에 대해 대등한 수준을 갖춘 사람과 함께 부르면 다른 노래가 나올 것 같다.

She 는 봄밤에 아주 잘 어울리는 곡이다. 다음 한 주는 이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또 금요일이 오길 기다릴 듯 하다.

 

가르치며 배우며 · 잡담과 희망

새로운 취미, 방송국놈들 흉내내기

아마추어지만 그래도 좋은 영상을 만들고 싶어서 퀄리티를 높이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방송국 프로그램처럼 자막을 넣어보기로 하고 (이 생각을 이제서야!) 새 영상에 적용해 봤다. 생각보다 괜찮게 나온 것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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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 스튜디오 새 영상을 작업하면서 푸른색 계열의 백그라운드를 넣어서 자막을 깔았다.

라이팅 스튜디오는 오랜지 컬러의 백그라운드를 넣어서 자막을 깔려 한다. 테스트만 해 봤다.

라이팅 스튜디오에서 중간에 나오는 소제목의 백그라운드 컬러는 푸른색으로 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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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는 시리즈물에 대해 폰트와 색상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이런 방향은 일찍 생각했어야 하지만 지금이라도 조금씩 찾아가는 중. 남들 눈에 띄지 않더라도 조금씩 향상된 것을 만들고 싶다. 시청자들 눈에 보이는 변화면 더 좋고.

잡담과 희망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넷플릭스 다큐 <오쇼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 시청 시작. 다큐가 예술의 경지네. 음악, 장면 전환, 인터뷰, 실제 사건 당시 화면 등 빈틈 없이 조화롭고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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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즈니쉬가 오쇼이기 전, 바그완이었던 시절의 거대한 실험을 빼고 그를 말할 수 없을 텐데 완벽할 정도로 이 명상 지도자 혹은 신흥 종교인의 실험에 대해서 들은 바 없었다. 서정적으로, 묘하게 매력적인 명상록 몇 구절이 전부였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한 지인이 떠올랐다. 모든 이념이 산산히 부서졌을 때 그 허무함을 연애로 채우던 사람. 본인 피셜로, 당시의 허무한 마음 그리고 이상을 위해 쏟던 열정이 갈 곳을 잃었을 때 그 에너지를 쏟을 곳이 연애 밖에 없다던 그 말이. 오쇼가 오레곤에 건설했던 그 문제적 유토피아에 모여든 전세계 수만명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다큐 여러편 봤는데 첫 회 보는 중간에 남긴 소감이 마지막 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지금까지 본 다큐 중 손에 꼽을만큼 수작.

특히, 쉴라를 비롯해서 당시 이 문제적 사건의 주요 인물들 인터뷰 만으로 나레이션 없이 다큐가 완성되었는데 얼마나 장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이어갔는지 다 보고 감탄했다. 쉴라는 정말 악마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그 실험의 판을 창조한 인도 여성. 굉장히 매력적이고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쉴라는 미국 교도소에서 10년 복역 후, 지금은 독일에서 치매와 조현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자그마한 공동체를 만들어서 생활한다. 세상에 지친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자며 쉴라가 오레곤에 만들려던 유토피아 – 그러다 애국심 넘치는 아메리칸들과 총까지 들고 싸워야 했던, 그 과거와 겹친다.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살인미수까지 저질렀던 악마로 불리우던 사람이 지금은 안전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 작은 코뮨을 건설한 느낌.

바그완은 오레곤에서의 실험이 실패한 후, 바그완이란 이름을 폐기하고 인도에 가서 한동안 이름없이 지내다가 오쇼라는 이름을 얻는다. 오쇼 사후, 명상센터는 확고하게 지역경제를 책임지는 비즈니스다. 스무명의 계승자가 오쇼 재단을 승계 받았다고 나오는데, 초기 총기가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빨아들일 것 같았던 그 ‘바그완’을 지키던 전사들이 밀려난 자리를 차지한 부유층 출신의 아메리칸 제자들. 그들의 비즈니스 역량이려나.

잡담과 희망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넷플릭스 다큐 <10대 사건으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은 2차 대전의 참상을 알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다큐. 조선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니까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일본인도 아닌데 전쟁터에 끌려 다니며 죽어야 했던 그 수많은 조선인 여성과 남성은 어떠했겠나,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10편짜리 다큐이며 굵직한 사건 위주니까 동아시아는 곁다리이고 전쟁의 본무대인 유럽이 가장 세밀하게 다뤄졌는데, 그러한 영상에서 전략 전술과 무기의 수준 군인의 사망 규모가 주로 다뤄지는 흐름에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 전쟁노예로 생을 마감한 여성들의 이야기.

10편의 사건 다 참혹하다. 노르망디 상륙을 위해 영국해협을 건널 때 겨우 스무살도 안된 영국인 병사들이 날씨가 안좋은 그날 배 위에서 개처럼 토하며 엄마를 부르고 울부짖었다는 일화도, 10편 중 참혹한 전투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스탈린그라드의 뼈만 앙상하게 남고 동사한 독일병사들의 모습도.

히틀러. 어떻게 저런 악마가 나타났는지 그 과정이 궁금할 수 밖에 없고 한번도 관심 없었는데 이 인간 연구하려고 <나의 투쟁> 읽는 사람들이 처음 이해가 갔다. 전쟁을 위해 독일군에 마약을 먹여가며 야간전투를 시키던 히틀러 자신도 결국 마약 중독에 의해 전쟁에 대해 오판하고 몰락한다.

마지막 10편이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2차 대전 종료를 다루기 때문에, 8편 드레스덴 폭격과 비교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드레스덴 폭격을 한 후 나치 괴벨스는 전략적으로 연합군이 문화적으로 보호해야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드레스덴을 철저히 파괴했는가’ 를 제3세계 언론에 알린다.

미국과 영국 정계와 언론에서도 이에 대해 다루는데, 그래서 연합군 내에서 균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미국) 내가 먼저 안떨어뜨렸어요. (영국의 처칠) 내가 하자고 한 거 아니예요.” 그래서 드레스덴 폭격은 한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을 살상한 것에 대해 윤리적인 고민을 던진 것으로 나왔지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할 땐 그 고민이 거의 없었다. 미국 정부에서 오로지 한명만 뚜렷하게 반대했고 나머지는 모두 이것은 단지 또 다른 무기일 뿐이니 떨어뜨려서 결사항전을 계속하는 일본을 무너뜨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태평양쪽으로 세력을 넓히려는 소련에 대한 무력 시위.

즉, 드레스덴에서 정말 교훈을 얻었다면 당연히 민간인이 있고 그들 나름의 역사적 건축물들이 남아 있던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는 신중하게 고려했겠지만 유럽인을 보는 시각과 일본인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독일의 항복 전까지 스탈린은 독일 저항군의 한 축이었지만 독일이 항복하고 난 다음 동유럽을 장악하며 세력을 뻗어가는 소련을 미국이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저지른 일이었다.

나치가 항복하고 난 다음, 철저히 재판해서 전범들은 그들의 죄값을 치룬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거의 모두 풀려났다. 마찬가지로, 소련의 영향력이 일본까지 뻗칠 것을 우려한 미국정부는 일본 역시 일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양국이 빠르게 협력체제에 들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노인이 된 참전용사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증언하다 입술이 떨렸다. 특히, 연합군 (주로 미군)이 유대인 수용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그 현장을 보았을 기자들에게 사진 찍고 기록하고 보도하도록 했고 수용소 인근의 독일인들을 데려와 수용소를 직접 보게 했다. 독일인들은 정말 몰랐을까? 당시 열살 정도의 소년이었던 생존자는 되물었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수용소 인근의 독일주민들은 이미 수용소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시체를 태우면 살점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사람들 옷에 붙곤 했으며 그 냄새는 선을 넘었기에.

나치가 유럽인들에게 준 충격은 어마무시하게 컸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유럽이 가장 발전했고 문명화 된 사회라고 지금도 그 때도 믿었는데 그곳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집단 학살을 저지르고 그 학살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온갖 계획과 기술을 동원했으니.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복종 그리고 인간성이 사라지고 잔혹함만 남은 모습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 을 떠올리게 했다. 윌리엄 골딩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이 소설을 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쓸 수 밖에 없었던 것. 그 소설의 작은 섬은 유럽의 축소판일 것이다.

 

유대인 학살, 문명 사회가 야만으로 돌변하는 것, 모두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주 큰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 가해자와 피해자가 백인들인 것이 아마 주요 이유일 것이다. 마치 코로나가 유럽에 퍼지고 나서야 심각하게 생각했듯이.

아프리카 민간인 학살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학살 등에 대해서는 이만큼 심각하게 기록하지 않는 것과 아주 크게 대비된다.

조선 땅을 중심으로 놓고 당시의 역사는 학창시절에 많이 배웠다. 넓은 눈으로 여러 사건이 어떻게 얽히고 섥혀 그 불행한 운명을 만들어 냈는지 본 것이 의미 있었다.

컬러로 복원한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가 했는데 현장감을 전달하는데 있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2차 대전이 정말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모든 전략을 다 쓰고 짧은 시간동안 무기가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해도 현재를 살아가는 내 눈에 그것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전쟁이다.

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런 고전적인 전쟁이 더 이상 아니라는 뜻. 그렇지만 더 이상 공군이 하늘에서 낙하산에 고무인형을 매달아 떨어뜨리는 클래식한 전법을 쓰는 전쟁이 더 이상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엔 변함 없다.

미국에서 the old days 라고 할 때, 백인 노인들이 기억하는 예전 그러니까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즈음의 시간. 흑백이 분리되어 있고 백인으로서의 권위가 확고했던 그 시절에 대해 향수가 있다고들 한다. 왜 독일 교민들이 유독 독일 내 인종차별에 대해 성토를 많이 할까 라는 의문을 읽은 적이 있는데, 한 시대 한 국가를 완전히 이성적으로 마비시킨 나치즘, 그 핵심적인 요소가 인종주의라면 그것의 영향력이 정말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사라졌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치 미국에 the old days 를 그리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와 비슷하게 한 세대 두 세대의 사상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듯) 그만큼 우생학의 시각이 오래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나치 시절을 그리워 한다는 게 아니라 그 기저에 깔린 인종주의적인 시각.